읽고 쓰다

작은 것들의 신

masoume 2019. 1. 5. 00:59
작은 것들의 신
국내도서
저자 :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 박찬원역
출판 : 문학동네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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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닌데 저번 달에 처음 참가하게 된 독서모임에 이 책이 선정되어 읽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 전개와 인도라는 낯선 문화적 배경, 소설이라기 보다 시에 가까운 추상적 문장들에 속도가 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난 뒤, 다시 한번 찬찬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야 이야기 구슬들이 꿰어진 느낌이었다. 다시 읽으면 처음에 놓쳤던 이야기와 소품들이 더 잘 보일 것 같다.



파파치의 장례식에서, 맘마치는 콘택트렌즈가 눈동자에서 빠질 정도로 울었다. 암무는 쌍둥이에게 맘마치가 우는 것은 파파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구부정하게 피클 공장 주변을 돌아다니던 것에 익숙했고, 때때로 그에게 구타당하던 일에 익숙했다. 암무는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며, 별 희한한 것들에 다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위를 돌아보기만 해도 놋쇠 꽃병으로 때리는 것은 약과란다, 하고 암무는 말했다. - p.76

체면과 본인의 명예만이 중요했던 파파치는 피클 공장을 차려 본인보다 잘나가는 와이프 맘마치를 증오하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그런 남편인데도 맘마치는 파파치의 장례식에서 통곡을 하며 운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부분이 되려 미운 정도 들어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가족에게 해서는 안될 행동이 용인되고 묵인되었고 이에 문제 제기를 하는 사회가 아니었기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라고. 파파치라는 사람, 아버지 그리고 남자라는 지위의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이었다.




아이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잊고 사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애쓰며 성장할 것이다. 지구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무의미한 사건이었다고 자신을 타이르려 할 것이다. 그저 '지구 여인'이 눈 한 번 깜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더 나쁜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났다고. '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그러나 아무리 그런 생각을 해도 그들은 위안을 얻지 못했다. -p.83

불행과 고통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의 고통 또한 언젠가 지나간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현재 나를 괴롭게 하는 감정과 사건들을 축소하고 깎아내려도 사라지진 않는다.




밴의 바닥에 죽은 로마 원로원 의원을 싣고, 환하고 복잡한 거리를 달리려니 묘했다. 푸른 하늘이 더 푸르러 보였다. 차창 밖에는 사람들이, 오려낸 종이인형처럼 종이인형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진짜 삶은 밴 안에 있었다. 진짜 죽음이 있는 곳. - p.226

나는 평소에도 문득문득 죽음을 떠올린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거나 잠에 들기 직전,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보는 순간 등등 내가 죽는다면? 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같은 생각들을 한다. 죽음이 배제된 삶은 “종이인형의 삶”처럼 껍대기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죽음은 왜이리 멀게만 느껴지고 꺼내선 안될 단어처럼 되었을까.

 



"엄마는 오후 악몽을 꿨어요." 딸이 말했다.
"악몽이 아니었어." 암무가 말했다. "그냥 꿈이었어."
"에스타는 엄마가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너무 슬퍼 보였거든." 에스타가 말했다.
"난 행복했단다." 암무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말로 그랬음을 깨달았다.
"암무, 꿈속에서 행복했다면 그것도 인정돼요?" 에스타가 물었다.
"인정되다니?"
"그 행복이요, 그것도 인정되는 거냐고요?" -p.304

이 구절은 너무 잔인했다. 꿈에서나마 잠시 사랑을 하고 행복해하던 암무에게 그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서.